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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아름다운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2002 - 12 - 30 서 찬 수
아주 어릴 적에 ‘사람이 죽으면 땅속에 묻힌다는데 나도 죽어서 그렇게 차갑고 캄캄한 땅속에 묻히면.....’ 하고 상상하다가 무겁고 갑갑하게 느끼는 순간 불현듯 두려움을 느낀 경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죽은 내가 아니고 내가 죽는 것을 생각하면서 느낀 공포심이었다. 주검은 오감육식(五感六識)이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겁을 먹었구나 하고 깨달은 것은 미련하게도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의학의 길에 들어서 시체를 해부하고 해골을 들고 공부하면서 또 임상에서 어쩔 수 없이 이승을 떠나는 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늘 생명(生命)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죽음도 존엄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어릴 적에는 천진(天眞)하여 무주처열락(無住處涅樂)이라고 생사(生死)에 헤매지도 않고 생사가 없다는 깨달음도 없이 그저 극락(極樂)을 살면서 성장하다가 죽음과 주검을 목도하거나 소중하게 여기는 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거나 생명에 위태로움을 겪거나 자기 생명같이 의지하던 대상(對象)을 뺏기거나 잃을 때 절망하면서 두려움과 죽을 맛을 보고 또 그런 연유로 마음 속에 품게 된 극도의 증오심과 공격적 충동 때문에, 또 그로 인한 죄의식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은연중 죽음의 공포를 과도하게 갖고 죽을까봐 겁을 먹고 동시에 어떻게든 살아야지 하고 지나치게 용 쓰다보면 늘 불안하고 긴장 속에 살게 된다. 그래서 별나게 무병장수에 집착하여 과장 선전된 불로초(不老草)에 기를 쓰고 매달리며 본말(本末)이 거꾸로 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고 가엽기도 하다.
원래 생(生)이 있으면 사(死)로 돌아가는 것이 현상계의 진실이고,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은 하나로 통일되어 돌고 돌면서 생사(生死)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生死輪廻)인데 생사(生死)를 분별하게 되어 사(死)를 꺼리고 두려워하면서 생(生)을 갈구 집착하여 환희 한다. ‘죽음은 태어남에서 오니 마땅히 태어남을 울지언정 죽음을 무서워 말라’는 말씀이 있지만 거꾸로 매달려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처럼 생사일여(生死一如)라고 도통한 사람이라도 역시 사는 것이 기쁘고 죽는 것은 슬픈 일일 것이다.
확실히 생사(生死)는 인생에서 큰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공자는 "죽음이 무엇입니까" 라는 제자의 물음에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했고 또 "성인(聖人)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런 성인이 어찌 생사(生死)를 모르고 그런 말씀을 했겠는가 싶은데 "아직 죽음을 모르고서야 어찌 삶을 알겠는가" 하는 역설(逆說)도 성립할 것이다.
장자(莊子)는 생(生)이나 사(死)나 만물이 유전(流轉)하는 일면상(一面相)으로 사람이 죽는 것은 꿈을 꾸다가 깨는 것으로 생(生)은 파멸이 아니고 전생(轉生)한다 하고 사람이 죽기를 두려워함은 아집에 걸려 현재에 갇혀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된다며 생사(生死)는 낮과 밤같이 보아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다고 했다.
생사고뇌에서 벗어나려면 우주실상(宇宙實相)과 내 존재가 무엇인가를 알고 자연의 흐름에 쫓아 그 본성을 인식하고 천지자연(天地自然)의 대도(大道)에 한 몸이 되는 것 밖에 다른 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사람은 사춘기 시작부터 이미 노화(老化)가 시작되니 노화란 죽음을 향한 느린 진행으로 100살이 되면 거의 99%는 다 죽는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효율적인 개체 보존과 종족 번식을 위해 유구한 세월을 통해 자연적으로 진화된 생명의 방책이 또한 노화라는 죽음으로의 과정이다.
미시적(微視的)으로 보면 인체(人體)의 여러 기관 각 장기를 구성하고 있는 조직세포 하나 하나가 생장하여 서로 상보적(相補的)으로 기능을 하다가 수명이 다하여 고사(枯死) 탈락하고 또 재생하면서 생사(生死)를 반복한다. 이렇게 우리 육체 내부에서 유전자의 자살(自殺)계획에 따라 조용한 죽음의 행진이 계속되지 않으면 개체의 생존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생(生)도 사(死)도 역시 상보적 관계에 있고 세포와 세포 사이에 미묘한 대화와 타협으로 죽어야 할 때 보람찬 미소를 머금고 죽어 가는 것이다.
논어(論語)에 크고 높은 뜻을 가진 사람(志士)과 인인(仁人)은 자기 삶을 위해 인(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자기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하는 일은 있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이제 이 몸도 벌써 어제의 이 몸이 아니고 내일의 이 몸도 오늘의 이 몸이 아니며, 이 나도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1초 전의 나는 벌써 이 순간의 내가 아니고 시간적으로 흘러간 존재고 공간적으로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상보적 관계로 반복하는 존재다.
삶이 있으니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니 삶이 있다. 삶 가운데 이미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이미 삶이 있다. 삶을 위해 죽음이 있고 죽음을 위해 삶이 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고 죽음이 장엄한 것은 삶이 있기 때문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기 때문이니지지 않으면 그리 귀할 것도 없고 아까울 것도 없다. 오히려 지겨울 것이다.
늙어가면서 오래 오래 산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지겨울까.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불만과 지겨움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 같다고 했다. 사람은 생노병사의 운명을 타고났으니 영원한 청춘과 영원히 건강한 육체를 보장받지 못한 존재다. 따라서 사라져 가는 낭만적 정열, 공허한 추억, 거칠고 삭막한 문명사회, 생의 무의미(無意味), 번뇌, 우울증...... 이런 ‘황무지’에서 차라리 살고 싶지 않고 오히려 죽고 싶은 영혼에게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T.S 엘리어트는 읊었는데, 그는 인생의 덧없음을 절실히 아파하고 진정 의미있는 삶과 구원을 갈구했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나 윤리학적으로 보아 개체 전체의 생존을 위해 미련없이 양보 자살하여 새 생명의 터를 마련해 주는 세포의 생멸(生滅)의 도(道)에 따라 사는 우리의 육신과 인간의 공생공존(共生共存)의 대의(大義)를 위해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오는 이기심을 좀 굽혀 양보하는 생멸의 도에 따라 살아야 하는 우리의 마음은 원래 근본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자비(慈悲)의 화신(化身)이며 이미 진선미를 살고 있는 셈이다.
불교심리학이나 존재론 현대물리학의 스트링이론에서도 모든 것은 생멸(존재와 비존재)의 순간적 상보적 반복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원래 무주처열락하는 동심(童心)이었는데 어디서 헤매다가 이제야 죽음을 찬미하며 인생은 대몽(大夢)임을 알게 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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