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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시론] 세종시를 세종대왕께 여쭙다
입력 : 2009.10.29
▲ 김인규·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세종대왕은 즉위 원년에 아주 곤혹스러운 문제에 봉착한다. 상왕(上王)인 아버지 태종이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沈溫)을 역모로 몰아 자살을 명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심온의 무죄를 알면서도 이를 막지 못했다.
세종은 태종 승하 후에도 심온과 그 가족들을 복권해주지 않았다. 냉혹하게 들리겠지만, 그랬기에 세종이 우리 역사상 최고의 현군(賢君)이 될 수 있었다. 법(法)경제학 용어로 얘기하면 '기회주의(opportunism)'를 자제함으로써 군주로서의 신뢰를 쌓았던 것이다.
지금 기회주의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MB) 당시 후보는 세종시가 '노무현 포퓰리즘'이란 걸 알면서도 대선 승리를 위해 그 추진을 약속했었다. 그랬던 그가 최근 "세종시 원안(原案)이 옳다면 갈 수도 있지만 아니라고 판단되면 바꾸는 게 지도자의 자세"라며 원안 수정을 시사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10·28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사실상 패배하면서 이에 대한 논란이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세종시 수정 추진이 MB 말대로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고육지책인가? 아니면 전형적인 기회주의인가?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원안 추진과 수정 추진에 대한 비용/편익 분석을 해봐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수정안을 택했을 때의 신뢰손실이 무형인데다 주관적 판단이 크게 작용하는 비용인지라 객관적 계량화가 어렵고, 따라서 두 대안의 계량적 비교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MB는 신뢰손실 비용이 낮다고 봤기에 수정안 추진을 언급했을 것이다. 반면 정치적 사심 없이 원안 추진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그 비용이 아주 높다고 본다.
세종대왕은 어느 안을 지지했을까? 신뢰를 중시하는 그분의 성품으로 봐서는 아마 원안을 지지했을 것 같다. 하지만 만약 세종대왕이 수정안을 선택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추진했을까? 다음 세 가지를 유념했을 것 같다.
첫째, 자신의 어쩔 수 없었던 기회주의에 대해 먼저 국민에게 진솔하게 사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을 바로잡는 것이 최고 지도자의 주요 책무 중 하나라고 국민을 설득했을 것이다. 충청인 총리 입을 빌려 변죽을 울리는 식의 얕은 재주보다는 자주 충청도나 세종시 현장을 방문해 그곳 민심을 어루만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뢰손실로 인한 비용을 최대한 줄이려 노력했을 것이다.
둘째, 포퓰리즘 정책 수정에 따른 배상을 필요최소한으로 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세종시 정책이 등장하기 전에 주민들이 누렸을 편익만큼만 배상했을 것이다. 계약법에서는 이것을 신뢰이익배상(reliance damages)이라 부른다. 이를 통해 포퓰리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편익이 잘해야 본전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알리려 노력했을 것이다.
셋째, 수정안 추진에 들어갈 예산 확보를 위해 포퓰리즘적 요소가 있는 정책들의 예산을 대폭 삭감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97년 말의 'IMF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의 건전 재정이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재정건전성 확보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세종시와 관련해 MB는 이상의 세 가지를 잘 지키고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다. 국민에게 진솔하게 사과하지 않았을뿐더러 수정안 추진을 위해 세종시 주민들에게 "수십년 먹고살 만큼" 크게 배상할 모양이다. 그리고 재정건전성은커녕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같은 포퓰리즘으로 재정수지를 크게 악화시키고 있다.
세종시 수정 추진은 그 자체로는 바람직할지 몰라도 기회주의의 나쁜 선례가 될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4대강 사업의 계속 추진을 공약한 후보가 당선 후 'MB 포퓰리즘'을 바로잡겠다며 사업을 백지화시키면 어떡하나. 세종대왕의 신뢰가 더욱 그리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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